안녕하세요. 조선 왕조의 수많은 이야기 중에는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왕세자들이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에 관한 책입니다.
폐쇄자가 5명
요절한 왕세자가 6명 요절한 황태자가 1명으로 모두 12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두 명의 왕세손이 조기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최초로 살해된 왕세자가 되다. 의안대군 이방석
제1대 왕 태조의 아들 의안대군 방석은 건국 시조 태조 이성계왕 계비 신덕왕후 강 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조선 최초의 왕세자다 그는 1382년에 태어나 1392년 11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방석은 동복형인 무한대군 방번과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막내 아들인 그가 왕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그것이 그의 명을 재촉하게 될 줄이야 그 당시 태조에게는 원비 신의왕후 한 씨가 낳은 장성한 아들이 6명이나 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들을 제치고 나이 어린 방석이 태조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데 이미 장성한 이복형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은 개국 공신들의 지원에 힘입어 왕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방석의 어머니 신덕왕후 강 씨가 죽고 아버지 태조마다 병석에 눕자
그를 지지하던 배후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그 틈을 타 원비 소생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이난의 성공으로 방석의 이복형 방원이 왕세자 방석을 폐위시킨 다음 귀양을 보냈다가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조선이 건국한 후 최초의 왕자 살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방번은 18세였고 방석은 17세였다.
신덕왕후 강 씨는 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올린 죄로 무덤 속에서도 수난을 겪었다.
남편인 태조 이성계가 죽은 뒤 그녀의 두 아들을 살해한 원비 소생 방원에 의해
몇 번에 걸쳐 무덤이 파헤쳐진다. 태종 이방원은 그녀가 이미 죽었고 두 아들을 살해했음에도 미움이 가시지 않아 그녀에 대한 왕비의 재래를 폐하고 소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게 했다.
또 태조 이성계가 덕수궁 근처에 마련해 준 그녀의 무덤인 정릉을 파괴하였고
청계천에 홍수가 나자 그 석물들로 다리를 놓도록 했다.
조선 최초의 왕비인 그녀의 왕릉 석물을 백성이 그대로 밟고 지나다니게 한 것이다.
할머니와 아버지를 잘못 만나 살해되다 폐세자 이왕 제 10대 왕 연상 군의 아들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의 아들 이왕은 연산군과 폐비 신 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잘못 만나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목숨마저 잃었다.
중종반정을 일으킨 반정 세력은 연산군을 폐위시켜 강화도의 교동으로 귀양 보냈고 이황도 왕세자의 지위를 박탈시켜 귀향을 보냈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연상군이 네 아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고 전한다 그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죽어갔으면 물론이다.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한 폐쇄제 이왕과 세 명의 남동생들은 시신도 거두지 못해 지금 어디에 묻혀 있는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폐쇄제 이왕은 할머니 폐비 윤 씨 아버지 연상 군을 두어 목숨까지 잃었다.
따지고 보면 폐세자 이왕의 아버지 연상군이 폭군이 된 것은 그의 할머니 때문이다.
그의 할머니가 누군가 제9대 왕인 할아버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폐비 윤 씨가 바로 그의 할머니다.
칠거지악에 걸려 그의 할머니는 성종의 개비에서 폐비가 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그녀는 후궁으로 간택되었다가 왕의 성은을 입어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할아버지 성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한 삼자락의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그 한 삼 자락의 피가 아버지 연상 군을 폭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연산군은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두 달 만에 역질에 걸려 죽었다.
강화도 교동면 고구리 산 속에 연산군의 위디 안치소가 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 죽음을 앞당기다
소현세자 이왕 제16대 왕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 한 씨와의 사이에 오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의문사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아들이 세 명이나 있었지만 한 명도 왕위에 되지 못해 왕으로 추전되지도 못했다.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정묘호란에 이어 조선을 제 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으로 조선의 전쟁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는 청군이 들이닥치자
이남인 봉림대군과 삼남인 인평대군 비빈 종실 등을 다시 강화도로 피난 가게 했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와 조정의 문무백관과 더불어 길이 막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에 항거했다.
남한산성에서 1만 3천 명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쇠로 12만 명이나 되는 청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한겨울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을 버티면서 싸웠지만 47일 만에 결국 청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선의 국왕 인조는 한강가에 있는 삼전도를 찾아가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군신 관계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청해 인질로 보내야 했다.
이때 척화론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재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인조는 치욕적인 모습으로 청나라 태종 앞에 소복을 입고 무릎을 꿇었다.
무릎만 꿇은 게 아니었다. 청나라 태종은 인조에게 한 번 전할 때마다 이 말을 땅바닥에 세 번 부딪히기를 세 번 반복하는 3대 구도구 항복례를 올릴 것을 요구했다.
소현세자는 인질로 청에 잡혀 있다가 8년 만에 34세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고국인 조선으로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인질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인조와의 사이가 너무 안 좋았다.
친청주의가 된 아들에 대한 반감이 있는 차에 후궁들 중 숭선군과 낙선 군 등 이남을 낳은 귀인 조 씨 이간질이 인조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급기야 인조는 소현세자가 조선의 국왕으로 부적격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돌아온 지 2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청에서 돌아와 병으로 들어누었는데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때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들은 그의 아버지인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상으로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고요 이 책은 조선시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왕세자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병으로든 독살되어서든 폐세자가 되어서든 나라가 망해서든 왕위 서열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들과 왕세손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비운의 왕세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다른 좋은 책으로 만나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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