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왕을 낳은 후궁들]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이야기

책돌이입니당 2023. 3. 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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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낳은 후궁들

안녕하세요. 오늘은 왕을 낳은 후궁들이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이 책은 후궁들의 삶을 통해 잃어버린 조선의 역사를 복원한 책입니다.
조선왕조 역사의 비극으로 남은 단종 연산군 광해군 경종

영조 사도세자는 모두 후궁의 아들이었습니다.
후궁 즉 첩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는 조선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내면에 연민과 콤플렉스를 남겼으며 정통성 논란으로 왕권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후궁이었던 생모들의 비극적인 삶이 그 자식들에게도 정신적인 상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 속 여성 이야기 발굴에 앞장서고 있는 저자는 왕의 여자보다는 왕의 어머니에 초점을 맞추어 왕을 낳은 후 공들의 삶을 살펴보고 그녀들을 통해 조선 왕의 모습을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면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어서도 아들을 지킨 어머니 단종의 어머니 현덕 왕후 권 씨 조선의 왕실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단종의 죽음일 것이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내쫓긴 어린 단종의 애사 그리고 단종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에는 여성들이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역모에 연루된 자의 어머니

또는 아내와 딸들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삶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사건의 당사자는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 살아남은 여성들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원수의 노비가 되어 평생 수모와 굴욕을 견뎌야 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세자빈 시절 단종을 낳고 곧바로 세상을 떠났지만 죽음으로써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후 세조는 죽은 지 16년이 지난 현덕 왕후의 묘를 파헤쳤고 종묘에 있던 신주마저 퇴출시켰던 것이다.
반란을 일으켜 조카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세조 수많은 희생과 죽음을 발판으로 쟁취한 왕좌였으나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조카에 대한 양심이 가책을 느꼈던 세조는 권 씨가 후궁 출신인데다 정식 가래도 치르지 않았으니 왕후라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며 현덕 왕후에게 분풀이를 했다.
권시를 서인으로 강등시켜 종묘에서 신주를 빼내고 소름까지 파헤쳐 그녀의 관마저 강물 속에 던져버리니 이보다 더한 패류는 일찍이 없었다.
조선 최초의 왕비 살해사건 연상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

1504년 시작된 갑자사화는 폐비 윤 씨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엄청난 복수극이었다.
연사는 내수사를 시 엄 씨와 정 씨의 시신을 찢어 젖슬담과 산과 들에 흩어버리게 하였다.
정 씨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은 자신이 어머니를 직접 매지라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결국 귀향 보내져 사약을 받았다.

소혜왕후 인수대비는 연산군이 머리로 들이받아 그 후유증으로 며칠 만에 숨을 거뒀다.
그리고 윤 씨의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모든 신하들은 그 가족까지 처형되었고 이미 죽은 한 명에는 관 속의 시체를 꺼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재위초 영명하던 연산이 갑자기 향락과 살상을 일삼는 폭군으로 전락한 것은 어머니 윤 씨의 죽음에 얽힌 내막을 알고 나서다

연산에게 윤 씨의 억울한 죽음을 알려준 자는 임사홍이었다.
어머니가 죄를 범하여 벌을 받은 것만으로 이해했던 연산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조선시대 가난한 양반가의 여식으로서 성종 4년 후궁으로 간택된 것은 크나 큰 행운이었다.

더욱이 입궁 다음 해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19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자 윤 씨가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비어 있는 중전 자리를 놓고 후궁 간의 경쟁이 치열했는데 수기 윤 씨를 비롯해 특히 효용정 씨와 엄 씨의 경쟁이 뜨거웠다.

결국 윤 씨가 왕비가 되었고 연산을 낳았다.
왕비가 되어 아들까지 낳았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으나 윤 씨가 원한 것은 성종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재임 기간 동안 정비 3명과 후궁 1명을 두었고 그 자손만도 16남 12녀로 여색을 즐겼던 왕이다.

성종의 여벽은 죄가 될 수 없으나 윤 씨의 질투는 죄가 되는 시대였다.
결국 그녀는 왕비에 오른 지 3년 만에 폐비가 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고 다시 3년 후에는 사약을 마셔야 했다.
아들을 버린 어머니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 씨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그 죽음을 부모가 나서서 주도했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자를 죽이라는 대처분을 요청한 사람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 씨였으며 명령을 내린 사람은 친아버지 영조였다.
더구나 뒤주영이라는 전대 미문의 흉축한 형벌을 제의한 사람은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고

세자빈 혜경궁 홍씨 역시 노론 세력인 친정의 편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하였다고 하니 사도세자의 죽음은 가족들이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친족 살인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도세자는 자신을 편들어주는 가족 한 사람 없이 고립된 채 한여름 뒤주에 갇혀 쓸쓸히 죽어갔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타게 말린 사람은 오직 어린 아들 정조뿐이었다.
누구보다 세자를 사랑했던 어머니 영빈이 씨가 모성애를 버리고 세자를 죽여달라고 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랑하는 아들에게 안전하게 정권을 이양하고자 했던 영조가 세자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영조 31년 즈음부터이다.

6년 정도 대리청정하면서 세자의 국정 운영 능력도 자리를 잡아갔고 영조도 일일이 간섭하지 않을 만큼 부자 관계는 원만했다.
하지만 갈등의 발단은 역시 당쟁이었다.
탕평 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노론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소론의 반발이 터진 것이다.

영조의 춘추 70이 가까워지자 병조판서 홍계희 영의정 김상로 세자의 장인 홍봉환 등의 노론세력들은 본격적으로 세자를 축출하기 위해 계략을 취했다.
영조 38년 나경원으로 하여금 세자의 개인적인 비행들을 빌미로 역모를 고변하도록 한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후궁인 박 씨를 때려죽이고 영조 몰래 관서지방으로 나가 유람하고는 여승과 기생을 궁에 들인 세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화증으로 인한 세자의 이상행동은 특히 정성왕후 인원왕후가 승하한 1757년부터 심각해졌다.
자신을 감싸주던 어머니와 할머니가 사라지자 외로움과 불안이 극대해진 세자는

화가 나면 내관이나 궁녀를 매질하여 죽이기도 하고 의대증까지 생겨 옷 입기를 꺼려하였다.
천이궁은 세자의 상태를 알고부터는 혜경궁을 만날 때마다 어찌 하냐 하며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나경언의 고변이 있고 한 달 후 선희궁은 결단을 내렸다.
영조를 찾아가 아들에 대한 대처분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상으로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고요 이 책은 조선시대 궁글안 깊숙이 감춰진 후궁들의 삶 속에서 권력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우리의 역사를 좀 더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본 책입니다.
왕의 어머니였던 후궁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왕을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삶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다른 좋은 책으로 만나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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