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스캔들] 미실은 어떻게 3명의 왕을 모셨나?

책돌이입니당 2023. 3. 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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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스캔들


안녕하세요. 여러분 삼국시대 잘 아시죠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있던 시대입니다.
그중에서 신라의 상류계층에는 특별한 성 문화가 있었는데요.
한 번 알아볼까요. 그래서 오늘은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 스캔들이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이 책은 신라인의 역사서 화랑 세기를 통해 신라의 성 풍속들을 들여다본 역사서입니다.
당시 독특한 사회상과 당시 신라인들의 정서를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 미실은 어떻게 세명의 왕을 모셨나

신라의 독특한 상류계층 색공지신 신라에서 색시는 전문직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색공지신 왕에게 색을 바치는 신화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이렇게 무려 3대 2 왕에게 색공을 바쳤다.

그녀는 왕의 여자가 아니라 왕들의 여자였던 것이다.
왕 이외에도 애인인 사다함과 소론랑 사통 관계인 동륜태자와 동생 미생 등 다양한 남자와 관계가 있었다.

후공이라면 원래 한 사람의 왕에게만 총애를 입는 것이 상식인데 어떻게 미실은 이렇게 여러 왕을 모실 수 있었을까 이것은 미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신라 시대의 보편적인 풍속이었다.
미실과 함께 진평왕을 모신 보명궁주 역시 처음에는 진흥왕의 궁주였다가 동륜태자와

관계를 가졌고 진평왕이 즉위하자 다시 진평왕을 모셔 총애를 받았다.
보명 역시 진흥 진평이라는 두 왕의 여인이었고 진평왕은 50년이 넘도록 치세 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왕을 모실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색공지신들은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왕의 총애가 사그러질 때까지 색공을 계속했던 것이다.
색공을 통하여 색꽁 지신들은 자신 가문의 이름을 높였고 가족들은 부기를 누렸다.
이런 상황은 왕후도 마찬가지였다. 폐위된 진지왕의 부인인 지도 왕후의 경우 진지왕이 폐위되자

진지왕이 죽은 것도 아니고 그저 폐위되어 갇혔을 뿐인데도 새로 즉위한 어린 진평왕을 모셔야 했다.
왕은 모든 것을 가질 권리가 있었고 왕에 대한 색공은 육체적 관계 이상의 충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색시는 정권이 바뀌어도 자리가 흔들리지 않는 전문직이었다.

왕에게 여자를 공급하는 통발이 따로 있었다.
신라에는 대원신통과 진골 정통이라는 인통이 있었는데 왕과 그 일가족에게 여자를 공급하는 계통이었다.
대원 신통의 계보는 옥진궁주까지 올라가고 진골 정통은 지소태후까지 올라간다.

옥진궁주의 손녀가 미실이고 사도태후는 미실의 이모였으니 미실과 사도태후는 대원신통의 대표주자였다.
따라서 진흥왕을 사이에 두고 사도는 왕후였고 미실은 첩이었지만 식이 질투하기보다는 대원신통의 영광과 권세를 확장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손을 잡았다.

대원신통과 진골 정통은 자신들의 계보를 이어가며 왕에게 경쟁적으로 세공을 하고 신분이 높은 남자들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치열하게 세를 경쟁했다.
특이할 만한 점은 대원 신통과 진골 정통은 철저하게 모개를 중심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색공은 허하고 사통은 금한다 자유분방한 신라의 성풍속에도 엄연한 법도가 있어서 신분이 높은 이에게 바치는 새고은 정당하고 아름다운 일로 여겼지만 사통은 엄격히 금했다.
미실의 어머니인 묘도는 법흥왕의 후궁이었는데 미진부를 사랑하는 사통의 관계가 되어

이 사실을 숨겼다. 미실 역시 동륜태자와 사통한 것을 진흥왕이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곤 했다.
신라의 여자들은 화랑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으나 화랑들 밑의 예절들과 몸을 섞는 것을 사통으로 금기시되었다.

김유신의 어머니인 만면 공주는 신분이 낮은 가야 후손 김서현 김유신의 아버지와 사랑했으나 사통이었기 때문에 도망쳤고 선화 공주 역시 서동요라는 노래로 인해 사통을 한 것으로 낙인찍혀 쫓겨났다

이렇듯 색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색공을 바치는 것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일종의 특권이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이 자매 사이에 남편을 주고받다 언니의 두 남편을 빼앗은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

첫 번째 남편인 용수도 왕실이 영화를 위하여 동생 선덕 공주에게 바쳤건만 두 번째 남편인 용춘 또한 빼앗겨 갔다가 뒤늦게 돌려주니 친동생이 어찌하여 언니의 마음을 이리도 찢어놓는단 말이냐 용춘을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것처럼 용수 또한 돌려받아야 마땅하건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나버리고 그가 남긴 내 아들 춘추만이 남아 있구나 천명 공주 오촌 당숙에게 시집가다 13살에 왕위에 올랐던 진평왕은 신라에서 가장 오래 지세를 한 왕이다.

579년에 등극하여 632년에 죽을 때까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왕좌에 있었다.
초기에는 사도태후나 미실 등의 기세에 눌려 제 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곧 이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나이가 들어 뒤로 물러나고 그는 장성하여 홀로 서기를 했다.
그러던 그에게 가장 결정적인 약점이 바로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
딸도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정도로 여권이 높았던 신라였지만 그래도 왕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였다.
남자는 용숙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새 여인의 풍모를 자랑하는 맏딸 천명공주가 어머니 마야 왕후에게 말했다.

천명은 사실 용춘 전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마야 왕후와 진평왕은 용춘을 용수로 오해하고 용수를 사위로 점찍었다.
용수는 천 명의 아버지 진평왕과 사촌 형제간이었고 천 명에게는 오촌 당숙이었다.

아들이 없는 진평왕은 용수의 인품을 높이 사 용수를 사위로 맞이하여 왕위를 물려줄 마음까지 먹고 있었다.
천명 선덕에게 왕위를 양보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둘째 공주인 선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활달함이 남달랐지만 선덕이 둘째 딸인 까닭에 왕위 계승 서열에는 올려놓고 있지 않았는데 갈수록 그 자태와 위용이 왕위를 물려받을 만했다.
왕위보다는 여자로서의 행복을 더 추구했던 천명은 왕위를 선덕에게 양보하고 월성을 나갔다.

당시 신라의 모든 성골은 월성 내에 모여 살았으므로 성을 나간다는 것은 곧 신분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선덕은 본격적으로 왕의 계승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첫 번째 준비는 먼저 자손을 보는 일이었다.
선덕이 왕에게 말했다. 용춘 전군이 고매하여 능히 저를 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추는 천 명의 남편 용수의 동생이었다.
용춘은 사양했으나 진평은 용춘에게 선덕을 받들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소식에 가슴이 아픈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선도의 언니 천 명이었다.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했는데 이제 사랑하는 용촌마저 동생에게 세공을 하러 들어간다니 언니 천 명은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왕이 색공을 명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라에서는 왕의 명이 있으면 남편이 있는 여인들까지도 새고에 응해야 했으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덕이 용춘을 받아들였으나 시간이 지나도 잉태가 되지 않았다.
천명공주와 선덕 공주 한 남자를 필요로 하다 선덕이 왕위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으나 손덕이 임신이 되지 않는 것이 모두의 불행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후사를 간절히 원했던 진평왕의 불행이었고 천명의 불행이었다.
왜냐하면 용춘으로부터 후사를 얻지 못한 진평왕이 이번에는 선덕의 상대로 용수를 불러들였으니 말이다.
뭐라고 선덕공주가 이제는 용수전군을 사신으로 삼는다는 말이냐 천 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명 곁에서 어머니의 기분을 달래주고 있던 춘추도 뜻밖의 소식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번에는 아버지가 선덕 공주님의 사진이 된다는 말입니까 사모하는 용춘이 동생인 선덕과 몸을 섞는 것을 생각하며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남편 용수가 또다시 사신으로 들어간다니 천 명은 치가 떨렸다.
용추나 이제는 내가 선덕 공주를 모시게 되었으니 내가 내 대신 천명공주와 춘추를 잘 보살펴주길 바란다

용수는 용춘에게 자신이 처자식을 부탁했다.
그러나 용수도 선덕과의 사이에서 자손을 보는 것을 실패하고 사신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여왕이 된 선덕 또 언니의 남편을 빌리다 선덕은 용춘 전군을 다시 지아비로 막기로 했다.

이제 월성에는 더 이상 성골 남자가 남아있지 않았고 용수 용춘의 혈통이 그나마 왕에게 가장 가까웠으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용수는 이미 죽고 없었다. 용수가 죽은 후 용추는 형의 처와 아들을 자신의 처와 아들로 삼았다.
용춘을 남편으로 맞아 행복한 나라를 보내고 있던 천 명은 다시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뭐라고

대왕께서 용춘 전군을 지아비로 만든다 하셨다고 천명은 용춘을 붙잡고 안 된다며 애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용추는 성덕대왕의 남편이 되어 궁에 들어갔고 천 명은 또 한 번 과부가 된 것처럼 홀로 남았다.

선덕여왕 세 명의 남편을 거느리다 여러 대신들이 모여 왕의 결혼 문제와 후사 문제를 논의했다.
용춘 전군을 지아비로 삼았으나 잉태가 되지 않으니 삼서의 제에 따라 세 명의 남편을 두심이 마땅하다고 사료되옵니다.
선덕여왕은 대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두 명의 남편을 더 들이기로 하고 김일재와 김흥반을 발탁하였다.

김용춘 김일재 김은반은 왕실에서 정하는 기일에 맞추어 순서대로 왕을 모시도록 하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은 공주 시절부터 두 명의 사신을 두고 색공을 받는 데 이어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무려 세 명의 남편을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결국 자손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상으로 책의 주요 은행을 살펴보았고요.
이 책은 신라의 독특한 상류계층 성문화인 색공지신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신라의 독특한 성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다른 좋은 책으로 만나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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