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조선왕 시크릿 파일(태종편)] 태종 영리한 책략가,  뒤끝 대마왕

책돌이입니당 2023. 5. 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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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 시크릿 파일

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왕 시크릿 파일 태종 편을 소개합니다.
태종은 조선 제3대 왕으로서 영리한 책략과 뒤끝 대마왕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태종은 조선 새 왕조 개창기에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 등에 의하여 견제되었습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성공한 그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피의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매우 영리하면서도 과감한 행동력을 지녔고 뒤끝 대마왕으로 불릴 만큼 뒤끝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면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똑똑한 아들 아비의 사랑을 받다

태종실록에는 이방원의 품성과 자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태종은 나면서부터 신비하게 남달랐고 조금 자라며 역명과 예지에 출중하고 글쓰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되었다.
이 내용은 한마디로 줄이면 똑똑했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똑똑하다는 것은 공부를 잘한다는 뜻인데 태종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공부를 잘했다는 것이다.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이런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비록 자신은 학문을 익히지 못해 변장을 누비는 변방위 무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아들만큼은 학문을 하여

중앙 정계에서 문관으로 살기를 원했는데 당원이 아비의 그런 소원을 이어준 것이다.
아들이 과거에 합격한 사실이 얼마나 좋았으면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대장부가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겠는가 흔히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는데 이성계가 그랬다

이렇듯 이성계는 자리만 마련하면 방원 자랑에 신이 난 아비였다.
즉 이성계는 방원 바보였다. 죽이 잘 맞는 계모와 정치적 동지가 되다.
태종 이방원은 1367년 5월 16일에 함경도 함흥 귀지동에서 이성계의 첫 부인 한 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방원이 태어났을 때 위로는 형 넷과 누나 경신 공주가 있었다.
큰 형 방호는 방원보다 13살이 많았고 둘째 형 방관은 10살 셋째 형 바이는 일곱 살 넷째 형 방가는 세 살 위였고 누나는 두 살 위였다.
그들 형제 외의 방원에게는 누나 같은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이성계의 둘째 부인 강 씨가 바로 그녀다 강 씨는 방원의 큰형 방어보다 두 살 더 어렸고 방원보다 열한 살 많았다.
큰 형보다 어린 계모 어찌 보면 누나 같은 계모였다.
그 계모 강씨 명민하고 똑똑한 방원을 좋아했다.
그래서 강 씨는 방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찌 내 몸에서 나지 아니하였는가 강 씨는 방원이 큰형 방어보다 두 살 어렸으니 비록 어머니라지만 형보다 어린 여자였다.
강 씨는 이 방원이 친아들이 아닌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로 방원을 총애했다.
방원이 영민하고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자기를 잘 따랐기 때문이다.

이방원과 강 씨는 정몽주를 죽이기로 이미 합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정몽주를 죽이지 않으면 이성계를 포함한 자기 집안이 몰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까닭에 정몽주를 죽인 것에 대해 이성계가 무섭게 화를 내자

이방원은 강 씨에게 편을 들어달라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강 씨가 이방원 편을 들자 이성계는 놀이를 누그러뜨리고 더는 이방원을 몰아세우지 않았다.
음묘한 인내력과 과감한 행동력 조선이 계곡 되자 강 씨와 이방원의 동지적 관계는 끝났다

그들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세자 책봉 문제였다.
조선 계곡 직후인 1392년 8월 태조 이성계는 당시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당시 개국공신인 배극렴 등은 이방원을 세자로 삼을 것을 요청했지만 태조는 왕비 강 씨의 주장에 밀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후 방원은 강 씨를 정적으로 간주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자칫 강 씨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이렇듯 음흉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다.
기회를 잡을 때까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기다릴 줄 알았다.

하지만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또 적을 공격할 때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무참히 죽이는 잔인한 구석도 있었다.
정몽주를 척살하는 사건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적이라고 판단되면 반드시 목숨을 끊어 놓았다.

하지만 이방원은 때가 될 때까지는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란 곧 계모와 아버지가 동시에 힘을 잃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1398년 8월 그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태조가 병상에 누워서 며칠째 일어나지 못했다.

자칫 병세가 더 악화되면 국상을 치를지도 모를 판이었다.
만약 그대로 태조가 일어나지 못하면 왕위는 방석에게 돌아갈 상황이었고 방석이 왕위에 앉으면 자신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란 불안감이 엄습했다.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 판단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던가

당원은 정몽주를 격살하여 조선 왕조를 무너뜨렸을 때처럼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398년 8월 26일 그는 6년간 숨기고 있던 야망을 가차 없이 드러냈다.
우선 자신이 사병을 빼앗는 작업에 앞장섰던 정도전을 격살했다.

또 이방석의 장인 희묘생 정도전과 뜻을 같이 했던 남문도 죽였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반역의 죄를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마침내 세자 방석을 죽이고 세자의 형 방송과 그들의 매형 이제도 죽였다.
이 모든 일이 하루에 벌어진 일이었다.

6년 동안 숨기고 있던 야망이 드러나는 순간 정적들의 목을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끈질긴 보호 기끝 대마왕 1408년 5월 태조가 죽자 태종은 그동안 숨기고 있던 계모 강 씨에 대한 증오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태종은 1409년 2월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기게 한 뒤 명령을 내렸다.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 등을 아예 없애버렸다.
그리고 땅에 묻어두었던 돌을 다시 꺼내어 광교 돌다리를 만드는 데 쓰게 했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만든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길러줬던 강 씨를 철저히 짓밟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태종의 강 씨에 대한 증오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태종은 바로 씨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강 씨의 자녀들인 방번과 방석 경순 공주 등을 모두 서자와 서녀로 격하시켰다.

그들이 목숨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신분까지 강등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태종은 뒤끝 대마왕이었다. 후궁으로 강등된 강 씨와 그 자녀들의 신분은 이후로 2백50년 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강 씨가 다시 왕으로 복귀된 것은 천종 때인 천6백육십구년이었다.
독존의 리더십

민무구 형제와 심온의 사건에서 보듯 태종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처남이든 사돈이든 가리지 않고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냉혈한이었다.
또 일단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면 제거 방식의 합리성은 따지지 않았다.
오직 상대를 제거하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며

일단 제거하기로 결심이 서면 반드시 죽음으로 내몰았다.
태종의 정치가 이런 시기였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태종에게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없었다.
태종과 다른 의견을 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태종의 정치는 한마디로 독존의 리더십에서 나왔다고 정의할 수 있다.
그 리더십 속에는 포용이나 화합 의리따위는 없었다.
복종 아니면 죽음 뿐이었다. 이상으로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고요 태종은 본인이 주모자이면서 교묘하게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수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좋게 말하면 영리한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영악하고 야비한 품성을 지닌 왕이었습니다.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다른 좋은 책으로 만나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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