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조선왕 시크릿 파일(세종편)] 팔방미인, 깐깐한 가부장

책돌이입니당 2023. 5. 10. 12:00
728x90
반응형

조선왕 시크릿 파일

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왕 시크릿 파일 세종 편을 소개합니다.
세종은 조선 제4대 왕으로서 팔방미인 깐깐한 가부장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그들의 업적이 아니라 인성과 사생활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 왕들의 강인하고 포용적인 모습과는 다른 지극히 인간적이고 색다른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궁중의 외로운 소년 1408년 2월 16일 궁중에서 한 소년이 결혼식을 올렸다.
나이 열두 살 꼬마 신랑이었다.

그 어린 소년이 두 살 많은 소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소년의 이름은 도 구노는 충녕으로 훗날의 세종이다.
신부가 된 소년은 당시 우부대원 우부승지 심온의 딸 곧 소헌왕후 심 씨였다.
소녀는 위로 누나 셋과 형 둘이 있었고 아래로는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그들 외에도 여러 명의 이복 형제가 있었다.
큰 형은 왕세자였으므로 결혼 뒤에도 궁궐에 남았지만 둘째 형 보아 소년 도는 궁궐을 떠나야 했다.
사실 그들을 빨리 결혼시킨 것은 궁궐에서 내보내기 위함이었다.

12살 소년이면 이제 막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나이이기에 혹 동료들과 염문이라도 날까 두려워 서둘러서 장가보낸 것이다.
궁녀는 모두 왕의 여인들이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여인들인데 그들과 아들에 대한 염문이 도는 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과 소년의 둘째 형은 12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 품을 떠나 궁 밖에서 살아야 했다.

소년이 궁을 떠날 당시 어머니 원경황후 민씨는 몹시 우울한 나라를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후궁을 들이는 문제로 불만을 표시했다가 질투가 심하다는 핀잔을 듣고 울화증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외삼촌들도 모두 유백한 상태였다.
세상이 알아주는 책벌레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독서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이 근심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도록 명했는데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맞이하느니 대게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이는 세종이 별세한 뒤 신하들이 지은 추도문에 나오는 내용인데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책벌레였다.
공부를 좋아했다는 것인데 태종도 그 점을 높이 평가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충녕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그를 잃는다 왕자 충녕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망나니의 형 범생이 동생 충녕대군은 자주 양녕대군의 행동에 간섭했다.

그 때문에 양녕대군은 늘 충녕대군이 눈을 피해 다녔지만 양녕대군이 뭔가 일을 꾸밀 때마다 충녕대군은 용케 알고 찾아와서 만류했다.
하지만 아무리 충녕대군이 충고해도 소용없었다.
양녕대군이 호색 행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양녕대군을 폐세자로 몰고 간 어리 사건이 터졌다.
어린 원래 곽선이 첩이었다.

그녀는 장 안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인물이 절색이었던 모양인데 양녕대군이 수하를 시켜 그녀를 빼앗아 궁궐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 말을 듣고 태종이 세자를 무섭게 꾸짖고 어리를 내쫓았다.
하지만 그 뒤 양녕대군이 장인 기말로는 자신의 어머니가 궁궐에 들어갈 때 어리를 동행시켜 양녕대군에게 바쳤다.

양녕대군은 그녀와 몰래 동침하였고 결국 아이를 밴 어린 은 궁 밖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 후 어리는 다시 동궁으로 들어왔는데 태종이 그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개성 궁궐로 돌아온 양녕대군을 태종은 무섭게 책망했다.

대전에서 물러난 양녕대군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태종에게 따지고자 하였다.
아버지 태종은 이미 여러 후비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동궁인 자신은 왜 여인 하나 거느리지 못하게 하냐고 따질 심사였다.
충녕대군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양녕대군을 만류했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막무가내로 다시 대전으로 뛰어들려 하였다.

충녕대군은 양녕대군의 소매를 억지로 끌며 겨우 달래 한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 뒤 양녕대군은 귀엽고 마음에 품었던 말들을 글로 써서 태종에게 올렸고 이는 결국 폐쇄자로 이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이 충고를 새겨 들었다면 폐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충녕대군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양녕대군은 자유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였지만 충녕대군은 윤리주의자이자 도덕주의자였다.
인자한 성품 실용적 인재관 세종의 인재 사랑은 때론 신분을 초월하기도 했다.

왕조시대의 근본은 신분제에 있고 신분을 초월하여 직분을 맡기는 것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특히 천민이 신분을 초월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관노 장영실이 재주와 능력을 높이 평가해 벼슬을 주고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에 대해 조정 대신들이 강하게 반대하자 영의정 황희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장영실은 제주만 정교하고 뛰어난 것이 아니라 명민하기가 보통이 넘는다 그러면서 장영실에게 정사품 혹은 벼슬을 내렸다.
세종은 인재를 알아보고 총애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단 인재를 뽑으면 그의 능력에 맞는 곳에 배치하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그가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세종 재위 이전에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세종에게 발탁된 이후부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된 인물이 많았다.
천문학의 대가 이순지 조선 음악의 거장 박연 육진 개척의 주역 김종서

세종 정치의 주춧돌이 된 황희와 맹사성 과학혁명의 초석을 다진 정초 등 수많은 인재가 세종에 의해 빛을 발했다.
때론 깐깐하고 때론 너그러운 지아비 세종은 왕으로서 성군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남편으로는 어땠을까 세종은 한 명의 왕비와 12명의 후궁을 뒀다.

왕비 소원왕후 심씨는 12살에 결혼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세종이 충양대군 시절에 결혼했으므로 군 부인이 되었다가 후에 세자빈을 거쳐 왕비에 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왕비가 된 이후 매우 불행한 일을 겪었다.

시아버지 태종이 친정 아버지 시몬을 죽였고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모두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그런 상황은 세종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됐다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도 장인의 신분을 복원시키지 않았고 처가 사람들은 천인 신분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 바꿔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소원 왕후는 평생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았다.
여느 남편이었다면 아내를 위해서라도 장인을 복권했겠지만 세종은 소원 왕후가 죽은 뒤에도 처가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 심씨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조강지처인 그녀에게 매우 자상했지만 아버지가 결정한 일을 아들이 뒤엎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바꾸지 않았다.
세종은 그것이 효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효를 실천하는 데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흔히 남편이 효자면 아내가 힘들다는 말이 있는데 세종이 딱 그랬다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하면 사랑하는 아내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도 세종은 여지를 주지 않았다.
참으로 비정한 남편이었다. 그런 깐깐한 면모는 후궁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소원 왕후 외에 세종에 가까이 한 여인은 모두 12명이었는데 그중 정식으로 후궁 반열에 오른 사람은 8명이었다.

나머지 4명은 후궁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이들 4명은 상궁 출신인데 원래 상궁은 인군과 동침하거나 아이를 낳아도 후궁이 될 수 없다는 법도였다.
이 법도는 세종이 정했다. 이를 지키기 위해 세종은 자신이 아이까지 낳은 상궁들에게 후궁자리를 주지 않았다.

이상으로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고요 세종은 생전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젊어서부터 앓고 있던 당뇨와 종기 중풍 막막증 등 한꺼번에 여러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다른 좋은 책으로 만나 뵐게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