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폐위 사건

책돌이입니당 2023. 5. 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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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왕조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 중 연산군의 어머니 윤 씨의 폐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 씨는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개비였으며 조선시대 왕 중에서 최초로 폐위가 된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의 어머니입니다.
폐비 윤 씨의 죽음은 후에 연산군으로 하여금 폭군 정치 및 폐위까지 이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폐비 윤 씨가 폐비가 되는 과정과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는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면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종의 계비로서 폐비가 된 재헌왕후 윤씨는 판봉상시사 윤기견과 부인 신 씨의 딸로 1455년에 태어났다

윤 씨는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수기에 봉해졌고 세조의 후비인 대왕대비와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해왕후 한 씨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 성종 7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때만 해도 윤 씨에게 다가올 엄청난 비극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나 많은 후궁들 속에 빠진 송종의 호색 기질은 이미 윤 씨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었다.

윤 씨가 왕비가 되고 보니 성종은 윤 씨의 처소에 발길이 뜸해지면서 소용정 씨와 엄 씨의 처소 출입이 잦았다.
그녀들은 송종의 총회를 차지하기 위해 재원왕후 윤 씨를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던 송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에게 접근했다.
인수대비까지 합세하여 홀대함으로써 재원왕후 윤씨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기만 했다.
칠거지악

아내를 내쫓는 일곱 가지 이유 중 질투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는 여간 힘들지 않았겠으나 그래도 끝까지 참았으면 원자인 연상 군이 있었기에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역시 그녀도 여자이었기 때문에 사랑받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윤 씨는 성종의 총애를 되찾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후궁들을 없애기 위해 어머니 신 씨가 알려준 민간 비방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 방법은 소장 방자라는 처방으로 성종이 자주 출입하는 후궁의 처소 길목에 시신의 뼈를 묻어두면 그 길을 밟고 다니는 후궁들이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처방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어서 윤 씨는 소용 정 씨와 엄 씨가 내통하여 자신과 원자를 죽이려 한다는 내용의 투서를 만들어 감찰상국 명의로 수기 권 씨에게 보내어 공개되자 궁궐은 발칵 뒤집혔다.

성종은 중종을 낳은 수기윤 씨 정현왕후를 비롯하여 내명부로 봉안 10여 명의 후궁들을 중전 뜨락에 모아놓고 문초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문초해도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며칠 뒤 성종이 윤씨의 처소에서 투서와 같은 종류의 종이를 발견함과 아울러 비상과 방향 비첩 푸닥거리 비방책까지 나와 윤 씨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종은 윤 씨의 폐위 문제를 여러 차례 거론했으나 네 번 원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조정 대신들이 반대했다.
성종은 사건의 결론을 얻지 못하자 윤 씨에게 비상을 바친 신녀 사월리를 처형하고 그의 어머니 신 씨의 직첩 조정에서 외명부에 내린 벼슬을 회수하여 궁궐 출입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성종은 많은 후궁 속에 묻혀 살았는데 특히 요염하고 미색을 갖춘 정소용의 처소 출입이 잦은 데 반발한 윤 씨가

성종의 용암 얼굴에 손톱 자국을 냄으로써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확대되었다.
인수대비 한 씨는 성종에게 윤 씨를 폐위시키라고 강력하게 요구했고 성종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조정의 원로 대신들과 승지들의 찬반 눈이 엇갈렸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1479년 성종 10년 6월 마침내 성종은 윤 씨를 폐서인하여 윤 씨 어머니 신 씨가 사는 사가로 내쫓았고 친정으로 쫓겨난 윤 씨는 바깥세상과 접촉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 씨와 빈곤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폐비 윤 씨를 쫓아낸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중전의 빈자리를 메울 새 며느리를 직접 고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간택의 결정 권한은 시어머니인 대왕대비가 쥐고 있었다.
인수대비는 자신이 마음에 든 정소영을 먼저 적고 후궁 몇 사람을 적은 간택 단자를 들고 대왕대비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은 인수대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작 왕비로 승격이 된 후궁은 19세기 후궁 수귀윤씨였다.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결정을 내렸다. 폐비 윤 씨를 몰아내는데 일조했던 후궁을 왕비로 삼을 경우 윤 씨의 폐비에 반대했던 신하들이 들고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말썽이 없었던 수기윤 씨를 선택했던 것이다.
1480년 성종 11년 11월 성종이 25세 새로 왕비가 된 윤 씨는 19세였다.

친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 씨가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을 무렵 1482년 연산군이 7살 때 세자 책봉 논의와 함께 윤 씨의 동정론이 있었으나 윤 씨의 폐비에 앞장섰던 소용 엄 씨 정 씨와 인수대비 한 씨 등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었고 이때 소영정 씨와 엄 씨는 성종에게 윤 씨가 궁궐에서 10년 먹을 재물을 가지고 나갔다고 거짓을 고하기까지 했다.

그해 8월 성종은 은밀히 내시 안중경을 시켜 폐비 윤 씨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3년 동안 회한의 눈물로 지내며 근신해 온 페비윤 씨와 어머니 신 씨는 오랜만에 찾아온 내시 안중경을 반갑게 맞으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상감께 성은이 망극하다고 전하오 부디 만수무강하랍시고 폐서인은 늘 상감마마의 만수무강을 기원할 뿐이오

그러나 폐비 윤 씨를 찾아간 안준경에게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성종이 폐비 윤 씨에게 내실을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인수대비는 시퍼렇게 설쳤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없는 일이로다 폐비를 복귀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수대비는 안중경을 데뷔 전에 은밀히 불러들여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도록 강압했다.

폐비는 아직도 니 오치는 빚은 조금도 없이 곱게 단정하고 온갖 교만을 부리면서 바락 하더라고 상주하라 안중경은 인수대비가 시킨 대로 성종에게 허위 보고하게 되었다.
패배 윤 씨는 아직도 뉘우치는 빚이 없사오며 곱게 꾸미고 교만을 부리면서 원자 아기가 장성하면 궁중에 호된 바람이 불 것이라며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안중경의 충격적인 보고를 듣고 성종은 1482년 성종 13년 8월 조정 대신들과 상의하여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8월 16일 폐비의 사저에 내관과 좌승지 이세좌 이국균이 사약을 들고 찾아왔다 폐비 윤 씨와 어머니 신 씨는 이제야 궁궐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세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교지를 잃자 폐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희씨는 물론 사약을 들고 온 승지와 내관들도 울었다.
잠시 후 윤 씨는 약사발을 들었다. 시뻘건 피가 금감 소매에 뿌려졌다.
그녀는 아직 의식이 있었다. 어머니 이 피 묻은 소매

간수하셨다가 원 원자에게 원통한 내 사연과 함께 전해주십시오 폐비윤 씨는 동대문 밖에 붙였다.
성종은 폐비 윤 씨 묘에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서 윤 씨 지묘라는 묘비명을 7년 만에 내렸다.

1494년 성종 25년 12월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년까지는 폐비 윤 씨의 문제에 관해 거론하지 말라며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상으로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고요 오늘은 연산군 어머니 윤 씨의 폐비가 되는 과정과 죽음에 이르는 내용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폐비 윤 씨의 죽음으로 조선은 피바람의 비극을 불러오게 됩니다.
이 일은 갑자사화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산군은 폐위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또 다른 좋은 책으로 만나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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